[옛고전에서 전해오는 조선왕조 500년 유머]
제3부 기발한 처지, 웃음이 절로 나오고 |
이극배(李克培)는 조선 세조 임금 때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
(李仁孫) 대감의 아들인데, 그 또한 성종 임금 때 영의정을 지냈
다. 이 이극배가 열 살 남짓 했을 무렵, 최씨 성을 가진 시골 선
비 한 사람을 집으로 모시고 와 개인 선생으로 삼아서 이극배를
가르치게 했다.
이에 이극배 집에서는 어린 여종 하나를 최씨 선비에게 고정
으로 배치하여 식사를 날라 오게 하고 모든 심부름을 도맡아 하
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이 여종이 늘 최씨 선비 주위에 있게 되니, 외로
이 혼자 거처하는 최씨 선비는 이 여종에게 마음이 끌려 밤이면
좀 불러 보고 싶은 충동이 태산 같았지만,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하고 안타까워하기만 했다.
선비 밑에서 글을 배우고 있는 이극배가 이를 눈치채고, 하루
는 최씨 선비에게 말했다.
"훈장 어르신, 어르신께서 저 여종에게 마음을 두고 계신 듯
하온데 소생이 주선해 올릴까요?"
"얘야, 넌 아직 어린데 그런 눈치를 다 챘단 말이냐?"
선비는 이렇게 말하면서 겸연쩍어했다. 그리고 최씨 선비는
외롭고 쓸쓸해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어떻게 잘되겠느냐
고 말하면서 역시 웃었다.
이에 이극배는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가, 이 여종이 관리
하는 부엌에서 은그릇을 하나 몰래 훔쳐 나왔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창고 안으로 들어가서 항아리 속에 담긴 재 밑에 깊숙이
넣어 숨겨 두었다.
옛날에는 양잿물이나 빨랫비누가 없었기 때문에, 아궁이에서
나무가 타고 남은 재를 모아 잘 간수해 두었다가 빨래할 때에 이
재를 물에 풀어 빨래를 했다. 그래서 이 재를 모아서 항아리 속
에 담아 창고 안에 넣어 두고 사용했는데, 그 항아리 안 재 속에
은그릇을 숨겼던 것이다.
이극배는 이렇게 해놓고 최씨 선비에게로 와서 이 사실을 알
리고, 앞으로의 계책을 선비에게 자세히 설명해 드렸다.
이튼날 집안에서는 그 여종이 은그릇 하나를 잃어버렸다고
소동이 벌어졌다. 여종이 은그릇을 아무리 찿아도 찿지 못하니,
마침내 여종은 그 벌로 매를 맞아야 할 처지에 놓였고, 이렇게
되니 여종은 사방으로 다니면서 점을 쳐보았지만 은그릇을 발견
할 수가 없었다.
여종이 걱정을 하면서 울고 있을 때, 이극배가 여종을 가만히
불러 이렇게 이르는 것이었다.
"얘, 내가 글을 배우고 있는 최씨 선비가 점을 매우 잘 친단
다. 말하지 않아 아무도 모르고 있지만 사실 선비가 점을 치기만
하면 반드시 맞히니, 너 울지 말고 최씨 선비에게 가서 점을 좀
쳐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해 봐."
하고 가만히 귀띔해 주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여종은 눈이
번쩍 뜨여 당장 최씨 선비에게로 달려와, 점을 쳐 은그릇을 꼭
찿아 달라고 매달리다시피 애원했다.
최씨 선비는 이극배와 약속이 되어 있었으므로 시치미를 떼
고 여러 번 사양하다가 말하기를,
"내가 점을 치는 일은 숨기고 있으므로, 밝은 대낮에는 곤란
하니 밤이 깊은 다음에 조용히 다시 혼자 찿아오너라."
하고 은밀히 일렀다. 이 말을 들은 여종은, 평소 최씨 선비가 자
기에게 은근한 정을 품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으므로 곧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그리하여 여종은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고는, 밤이 깊
은 뒤에 선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여종은 선비 앞에 공손히 절을 올리고 앉아, 은그릇을 꼭 찿
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다. 이 때 최씨 선비가 여종
의 손을 잡고 끌어당기면서,
"은그릇은 반드시 찿아 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고는 힘껏 품에 안았다. 최씨 선비는 평소에 애만 태우던 그
정감을 마음껏 발휘해, 여종을 안고 누워 깊은 정을 나누었다.
그리고는 옷을 입고 앉아 점치는 흉내를 내며,
"창고에 항아리가 있구나. 그 속에 담긴 재를 뒤져 보아라."
하고 일러 주었다. 이에 여종은 곧바로 달려가 항아리 속에서 은
그릇을 찿아냈다. 그리고 다시 선비 방으로 달려와 울면서 고맙
다는 절을 올렸다.
여종은 그렇게도 걱정했던 은그릇을 찿았고, 또 평소에 선비
를 뒷바라지하면서 느꼈던 친근함까지 겹쳐, 이날 밤 다시 선비
의 품에 안겨 감격스러운 한 밤을 보내고 새벽에 나갔다.
여종은 너무나 좋아서, 최씨 선비가 점치는 일을 비밀로 하라는
당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방마님에게 가서 자랑삼아 이렇게 이
야기했다.
"마님, 도련님을 가르치는 선비 어른이 점을 쳐서 은그릇을
찿았습니다. 정확하게 창고 안 재 항아리 속에 있다는 것을 일러
주었습니다. 정말 너무 잘 맞히었습니다요."
안방마님은 여종의 말이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해하다가 기
이한 일이라며 감탄했다. 이날 밤 안방마님이 남편 이인손 대감
에게 이 얘기를 하니 대감도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이런 일이 있은 얼마 후, 중국에서는 황제가 옥새(玉璽)를 분
실하여 대소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중국의 여러 점쟁이가 점을
쳐보았지만 찿지 못하고, 조선에 점 잘 치는 점쟁이가 있으면 중
국으로 보내라는 연락이 왔다.
이에 우리 임금이 대신들을 모아 놓고 물었다.
"우리나라에 잘 알아맞히는 점쟁이가 있으면 말해 보시오."
"예 전하, 신 이인손 아뢰옵니다. 신의 집에 신의 자식을
가르치는 선비가 점을 매우 잘 치옵나이다."
임금의 물음에 이인손 대감이 이렇게 아뢰니, 임금은 곧 최씨
선비를 중국에 보넬 수 있게 주선하라고 하명했다.
이렇게 되니 점을 칠 줄 모르는 최씨 선비는 이제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극배를 보고, 점을 칠 줄 모르는 사람
을 거짓으로 꾸며 이제 중국까지 가서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고
하면서 걱정했다. 이 말을 들은 이극배는 차분하게 말했다.
"훈장 어르신, 매우 좋은 기회를 얻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소생의 계책을 들으십시오. 지금 중국은 평온한 시기이니, 옥새
를 훔친 사람은 분명히 궁중 내부 사람의 소행일 것입니다. 소생
이 지금부터 꾸미는 계획대로 하시면 반드시 옥새를 찿을 수 있
을 것이오니 잘 들으소서."
이렇게 말하고, 중국에 가서 행할 계책을 최씨 선비에게 자세
히 일러 주었다.
최씨 선비는 곧 이극배가 일러 준 계책대로 하기로 하고 중국
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먼저 황제에게 아뢰기를,
"먼 길을 왔으므로 10일 간 안정을 취하게 해주소서."
하고 10일 간의 여유를 얻었다. 그리고 10일 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쉰 후에 다시 황제에게 아뢰었다.
"신이 점을 치니 조선의 시골에 있는 신의 집에 오늘 아침 화
재가 발생하였사옵니다. 따라서 아음이 번거로워 조금 더 여유
를 주셔야 하겠나이다."
이 말에 황제가 의심을 품고 사람을 급히 조선으로 파견하여
알아보게 하니, 다녀온 사람이 아뢰는데 정확하게 그날에 시골
선비의 집이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
것은 물론 선비가 중국으로 가기 전에 이극배와 말을 맞추어 놓
았고, 이극배가 그 약속한 날에 시골 선비 집에 가서 불을 질렀
기 때문이었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감탄하며 시간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시
간을 더 주겠다고 말했다. 최씨 선비가 이러고 가만히 살펴보니,
중국에서는 조선에서 온 점쟁이가 매우 영이(靈異)하여 아무리
숨겨 놓아도 반드시 찿아내어 맞힌다는 소문이 중국 전역으로
번지는 것이었다.
이후 최씨 선비는 일부러 매일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방
안에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중에 한 사람이
문밖에 찿아와서 살려 달라고 하며 애원했다. 선비는 이극배의
계책이 정확하게 맞는다고 생각하고 긴장하면서, 위엄 있는 목
소리로 무슨 사연인지 말해 보라고 했다.
이에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인은 궁중에서 일을 보는 아무개입니다. 그 옥새를 소인
이 훔처서 궁궐 후원 연못에 던졌습니다. 필시 대인께서 점을 쳐
알고 게실 것으로 생각되어 이렇게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왔습
니다. 제발 제 이름만은 숨겨 주시면 크게 사례하겠습니다. 소인
은 궁중 옥새 관리인과 감정이 상해서 그 사람이 벌을 받게 하려
고 옥새를 훔친 것이지 다른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 선처를 바라
옵니다."
이러고 울면서 비는 것이었다. 이에 최씨 선비는 다 알고 있
었다고 말하며, 선처하겠으니 물러가 있으라고 해서 그 사람을
안심시켜 돌려보냈다.
본래 이극배가 이런 방법으로 하면 틀림없이 범인이 목숨을
구해 달라고 자진해서 찿아올 것이라 했는데, 그 계책이 꼭 들어맞
은 것이었다. 선비는 어린 이극배의 용의주도한 계책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튼날 선비는 의젓하게 황제 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신 점괘를 얻었나이다. 사람을 동원해 후원 연못의 물을 퍼
보시옵소서. 옥새를 찿을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이 말에 황제가 즉시 명령하여 연못의 물을 퍼내게 하니 과연
연못 속에서 옥새가 나왔다. 이어 선비는 다시 아뢰었다.
"점괘에 옥새를 훔친 사람 이름이 거명되면 황제에게 불길하
다고 나와 있사옵니다. 더 묻지 말아 주시옵소서."
이렇게 해서 선비는 약속대로 훔친 사람을 숨겨 주었다.
이날 밤, 간밤에 왔던 그 사람이 다시 문밖에 나타났다. 그는
고맙다고 사례한 다음 많은 보물을 두고 갔다. 이어 황제도 큰
상을 내리고 잔치를 베풀어 칭찬했는데, 잔치 자리에서 선비는
황제 앞에 나아가 엎드려 아뢰었다.
"황제 폐하, 신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느라 너무 정력을 소모
하여 이제 더 이상 점을 칠 수 없게 되었사옵니다. 천하에 명령
을 내려 신에게 점을 쳐달라는 일을 금지해 주시옵소서."
이래서 최씨 선비는 황제의 명령으로 더 이상 점을 치지 않아
도 되었고,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광질(狂疾)이 생겨 더 이상 점
을 칠 수 없다고 선포했다.
최씨 선비는 이극배가 장성하여 급제한 후에, 고향으로 내려
가 중국에서 받아 온 보물로 부자가 되어 잘살았다. 그리고 이극
배 집의 그 여종을 데리고 가서 첩으로 삼아, 한평생 한집에서
아내와 함께 의좋게 살았다.
그러나, 이극배의 계책에 의하여 거짓으로 꾸며 점을 쳤다는
이 사실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이 얘기의 사실 여부 또
한 확인된 바 없다고 한다.<조선 초기>
[옛 고전에서 전해오는 조선왕조 500년 유머 / 김현룡 지음]
......^^백두대간^^........白頭大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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