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司馬遷)은 《史記》에서 '千金을 가진 者는 군수(郡守)와 상 대하고, 萬金을 가진 자는 천자(天子)와 상대한다'고 하지 않았 던 가. 중국에서 재벌(財閥)은 春秋時代부터 등장했다.
孔子의 수제자 였던 자공(子貢)은 춘추시대 말기의 재벌이었다.
孔子가 제국 (諸國)을 유세(遊說)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의 재 력 덕분이었 다고 하니 지금말로 하면 산학협동(産學協同)인 셈이 다.
戰國時代에 오면 전쟁 때문에 무기상이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이때 비로소 정치재벌이 등장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여불 위(呂不韋)였다. 그는 본디 소금과 비단으로 거부가 된 者였다.
한번은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에 들렀다가 우연히 인질로 와 있 던 진(秦)의 왕자 자초(子楚)를 만나게 되었다.
상업의 귀재 였던지라 그는 첫눈에 子楚의 값어치를 꿰뚫어 보았 다.
"음, 투자해 볼 만한데!"(奇貨可居)
그는 놀랍게도 '天子의 자리'를 투자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子楚에게 금전공세와 함께 애첩 조희(趙嬉)까지 바 쳤는데 이미 임신중이었다고 한다.
그의 투자는 적중해 후에 子楚는 秦의 왕(莊襄王)이 되고 애첩 조희는 황후가 되었으며, 얼마 뒤 자초가 죽어 아들이 즉위하니 이가 진시황(秦始皇)이다.
呂不韋도 옛날의 애첩과 함께 부귀영화를 누렸음은 물론이다.
[주] 여불위(呂不韋):전국시대 말엽의 진(秦)나라 승상. 한(韓)나라 사람. 큰 장사꾼으로써 천금을 던져 볼모로 있던 왕자 자초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함으로써 승상이 됨. 13세 어린 나이로 즉 위한 정(政:진시황) 으로부터 중부(仲父)라 불리며 문신후(文 信侯)에 봉해짐. 3000면의 식객을 모아 30여만 어(語)에 이르 는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 수하는 등 위 세를 떨쳤으나 후 에 밀통 사건에 연루되어 진시황에 게 벌을 받고 좌천되어 자 살했음. 진시황의 친 아버지라고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