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晉:265∼316)나라 시대, 제(齊)나라의 도읍 임치(臨淄) 출신의 시인에 좌사(左思)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 났으며, 아버지인 좌옹도 하급관리에 서 몸을 일으켜, 그의 학문이 팔려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발탁된 사람이다.
그는 뛰어난 문재(文才)를 지니고 태어났지만, 용모가 추할 뿐 아 니라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더듬었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접촉을 싫 어하고, 집에 들어박혀 창작에 열중하며 매일을 보내고 있었 다.
이렇게 하여 1년 동안 걸려서 제나라의 도읍이었던 임치의 모습 을 운문(韻文)으로 엮은 제도지부(齊都之賦)를 쓰고, 이어서 삼국 시대 촉한의 도읍인 성도(成都)와 오나라의 도읍인 건업(建業)과 위나라 의 도읍인 업을 노래한 삼도지부(三都之賦)을 지었다.
삼도지부의 평판은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작품은 반고(班固)의 이도지부(二都之賦)나 장형(張衡)의 이경지부(二京之賦)에 비하여 결코 월등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자 부하고 있던 그는 자기의 작품을 끌어안고 황보밀의 문 을 두드렸다. 황보밀은 무제의 자주 있었던 벼슬 요청에도 응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면서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던 재야의 석학 (碩學)으로 현 안선생(玄晏先生)이라고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황보밀은 그 글을 한 번 읽고서,
"이것은 멋진 글이군!"하고서, 그 자리에서 서문을 써 주었다.
다시 장재(張載)가 위도지부(魏都之賦) 에, 중서랑인 유달이 오도 지부(吳都之賦)와 촉도지부(蜀都之賦)에 주를 다는 등 마음에 있 는 사람들로부터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되었거 니와 그 이름을 결정 한 것은 사공(司空) 벼슬에 있는 장화(張華)가 절찬하는 말이었다.
"이 작품은 정말로 반고나 장형의 작품과 어깨를 겨룰 만하다. 다 읽고 나면 독자로 하여금 여운이 요요하고 날이 갈수록 다시 감명 을 새롭게 함을 깨닫게 하는 바가 있다."
이 말을 전해지자《삼도부》는 당장 낙양의 화제작이 되었고, 고관 대작은 물론 귀족 환관 문인 부호들이 그것을 다투어 베껴 썼다. 그 바람에 '낙양의 종이값이 올랐다[洛陽紙價貴]'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