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 /칠레 /아메리카 예수회 기록물(80)

eorks 2019. 8. 21. 00:47

세계기록유산 /칠레 /아메리카 예수회 기록물
[ Jesuits of America]
    칠레 국가기록보관소(Archivo Nacional de Chile)에 보관된 ‘아메리카 예수회(Jesuits of America) 기록물’ 유산에는 앤틸리스 제도·아르헨티나·콜롬비아(보고타)·볼리비아·쿠바(아바나)·에콰도르·에스파냐·필리핀(마닐라)·멕시코·파라과이·칠레 등에 관한 역사(17, 18세기)의 증언이 들어 있다. 이곳은 모두 예수회가 활동했던 지역이다.

    예수회는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Pope Paul III, 1468~1549)가 정식으로 인가함에 따라 로마에서 발족했다. 설립된 예수회의 회원은 르네상스 시대에 살고 있으나 중세 말기의 기독교 전통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소르본 및 다른 대학들에 다녔지만, 그들의 목표는 교실을 떠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범선을 타고 서인도 제도나 동인도 제도로 떠나 선교를 하는 것이었다. 1548년 서양 문명을 위한 결정적 조처의 하나로 시칠리아의 도시 메시나(Messina)에 최초의 ‘신학교(collegium)’가 설립되었다. 이곳에서는 기독교 전통과 유럽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라는 고유한 문화를 두 기둥으로 하여 청소년들을 양성했다. 이들 학교는 1540년 예수회 발족 당시의 계획에는 없었지만, 예수회 최초의 사제 양성소가 되었다. 이것은 예수회의 또 다른 큰 목적이 이교도, 즉 당시 서양의 기독교 문화를 벗어난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사회에는 포교단체가 설치되었지만, 포교 작업은 바로 학교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학교는 새로운 교육, 사람답게 만드는 새로운 기술, 기독교적 인문주의의 ‘기초 훈련’의 보루가 되었다. 교육은 다른 형태의 포교였다. 학교로 대변되는 제도적인 포교의 이중성은 예수회 신부들이 활동을 전개하는 모든 곳의 생활방식이 되었다.

    ‘아메리카 예수회 기록물’은 구체적으로, 예수회가 1767년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3세(Charles III, 1716~1788)의 모든 영토에서 추방된 뒤 성 이그나티우스 교단(Order of Saint Ignatius, 예수회)이 자리 잡은 모든 구역에서 가지고 있던 재화와 토지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했던 왕립기관인 예수회세속재산관리국에서 수집 및 작성한 문서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수회세속재산관리국에서 만들어진 문서과 함께, 예수회 추방이라는 포고가 적용됨에 따라 원래의 문서들에 광대한 예수회 토지 재산의 목록, 회계장부, 칙령, 서한, 교섭, 보고서, 종교·교육·경제 활동에 관한 풍부한 정보와 더불어 성 이그나티우스 교단에 속했던 다수의 문서가 통합되었다.

    따라서 예수회 기록물은 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식민지역에서 해왔던 예수회의 지속적이며 보편적인 활동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는 국제사회에게는 고유한 참고자료이다. 예수회를 연구하는 어느 역사가는 말하기를, “그들은 합리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비에 접근했을 뿐 아니라 가능한 모든 방식을 동원한 구체화한 사회 형식으로써 그들의 작업을 실행하려고 노력했다. 즉, 인문주의적 문화 속에서 역사적으로 그것을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했다. 이 점에서 128,000장 이상의 ‘아메리카 예수회 기록물’에 포함된 정보는 본질적으로 17세기, 18세기, 19세기 초 서양의 역사, 광대한 에스파냐 제국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오늘날 그것은―실제로 그것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든지―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기록유산이다.
국가 : 칠레(Chile)
소장 및 관리기관 : 칠레 국가기록보관소(Archivo Nacional de Chile)
등재연도 : 2003년
세계적 중요성·고유성(독창성)·대체 불가능성 :
- 아메리카에서 예수회의 존재는 대륙의 이미지를 바꾸었다. 아메리카의 종교·사회·정치·경제생활에 대한 예수회의 기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돌이키지 못할 정도로 깨뜨리는 것과 같을 것이다.

- 성 이그나티우스 교단의 활동 목적은 토착민·노예·혼혈인 사회에 신앙을 보급·선전·보존하려는 것이었다. 이교도에게 전도를 하는 가운데 신부들은 토지를 개간하고, 토착민의 언어를 배우며, 역사·교리문답·문법을 저술하고, 지도를 제작했다.

- 교육 문제에서 초등·중등·대학의 학습은 완전한 혁신이 이루어졌다. 엘리트 교육은 신부들이 최우선으로 삼았던 것의 하나였으며, 그에 따라 중요한 문예활동이 꽃을 피웠다. 그리고 다른 사회집단의 교육도 무시되지 않았다. 예컨대 노예들의 학교에서도 그들이 수행했던 여러 가지 일에 필요한 정신적 지원을 했음이 자료로 남아 있다.

- 그들 자신의 훈련과 새로운 대륙에서 제기된 필요성 때문에 그들은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었으며, 이 때문에 다른 교단과 차별화되었다. 일상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과는 별개로 재산을 축적할 수 있게 됨으로써 자금이 필요한 영적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 국가기록보관소에 있는 기록물은 특정한 교단 예수회의 존재가 아메리카 대륙에 미친 영향, 그리고 귀족계층의 교육, 다양한 문화 적응의 방법을 통한 원주민의 교화, 인구 대다수의 영적 생활에 대한 관심, 당시의 중요한 경제적 측면, 당대의 신학적·철학적 지성의 전파 등과 같은 식민지시기에 예수회가 발전시켰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 준다.

- 예수회의 학교에서는 엘리트 교육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포교 활동 또한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곳에서 신부들은 과제를 해결하고 신학과 철학에 대해 생각했으며, 원주민의 언어를 연구하여 문법을 다루는 중요한 글을 썼다. 이들 기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영적 훈련 장소, 당시의 많은 남녀의 영성에 대한 후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수회가 에스파냐·포르투갈·프랑스 등의 영토에서 추방당한 뒤 라틴아메리카로 나갔던 회원들은 교황의 포고에 따라 이탈리아 북부로 소환되었고, 그곳에서 실제로 반세기가량 머물렀다.

예수회는 1801년~1815년 사이에 그들을 추방한 나라들의 왕명에 의해 차례로 부활되었다. 원상회복을 개시한 것은 교황 비오 7세로서, 예수회를 추방하지 않았던 유일한 나라였던 러시아의 예수회를 공식으로 인정하는 1801년 3월 7일의 교서를 통해서였다. 예수회는 그들의 교육적 성과 덕분에 여러 나라의 정부로부터 요청을 받고 각 나라에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의 옛 재산은 반환되지 않았으며, 포교 사업·공예품 생산·교역 또는 농사 등도 재개하지 못했다. 또한 그들이 추방되었을 때 다른 교단과 신도들에게 넘긴 예식용품, 신부들의 복식, 도서관 등도 돌려받지 못했다. 게다가 예수회 기록보관소의 문서들도 세속재산관리국을 계승한 정부기관에 머물러 있다가 공공 기록보관소나 도서관으로 넘겨졌다.

이 기록물들은 예수회세속재산관리국의 활동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회가 활동한 방식을 마치 X선처럼 명확하게 보여 주는 것이며, 예수회를 추방하며 에스파냐 국왕이 노렸던 목적 가운데 하나 ― 예수회의 개발에 의해 이전의 소유주가 받았던 이윤의 획득 ― 에 부합하지 못했던 관료들의 행정에 대한 것까지 설명하고 있다. 문헌들은 분명히 예수회의 재산, 그리고 그들의 소유지에서 조금씩 이루어졌던 온갖 생산시설·제조·공예품·금은 세공소·교역·약초 거래, 그리고 가장 잘 알려진 학교 및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등에 관한 회계상의 내역 등을 알 수 있다. 세속재산관리국에서는 예수회가 질서·엄격성·경제 및 재무적 능력을 가지고 했던 이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없었거나 이전 보다 덜 관리했다.

물론 예수회가 포교 사업을 통해 만들어졌던 일관성과 지속성을 바탕으로 굳건히 유지되었던 체제는 지금은 무너졌지만 ‘아메리카 예수회의 기록물’은 고유하며, 하나의 단일한 기록물 안에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는 문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메리카 예수회 기록물 [Jesuits of America]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영/불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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