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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 /이란 이슬람 공화국 /사디의 『쿨리야트』(324)

eorks 2020. 4. 24. 00:08

세계기록유산 /이란 이슬람 공화국 /사디의 『쿨리야트』
[ Kulliyyāt-i Saʽdi]

National Library and Archives of the IR of Iran, Beginning of the Ṣāḥibiyya.

National Library and Archives of the IR of Iran, Beginning of the Arabic Odes.

National Library and Archives of the IR of Iran, Beginning of the Gulistān.

National Library and Archives of the IR of Iran, Beginning of Khawātim.

National Library and Archives of the IR of Iran, Beginning of the Lamentations.

National Library and Archives of the IR of Iran, Beginning of the Questions and Answers of Ṣahib Dīwān.

National Library and Archives of the IR of Iran, Beginning of the Third Sermon.

National Library and Archives of the IR of Iran, Beginning of the Būstān.

National Library and Archives of the IR of Iran, Colophon of the Strophe-Poems (Tarjīʽāt).

National Library and Archives of the IR of Iran, Cover binding made of burned brown goatskin leather, decorated with gilded half and a full medallion.

National Library and Archives of the IR of Iran, End of Macaronic, Triangular and Sarcastics.

National Library and Archives of the IR of Iran, First page of the Five Sermons.

National Library and Archives of the IR of Iran, Full medallion gilded and painted with Azure before the beginning of the Fifth Sermon.

National Library and Archives of the IR of Iran, Table of content (Six Treatises).


국가 : 이란 이슬람 공화국(Islamic Republic of Iran)
소장 및 관리기관 : 이란 이슬람 공화국 국립도서관 및 기록보관소(National Library and Archives of the Islamic Republic of Iran)
등재연도 : 2015년
시간과 장소의 경계를 초월하는 페르시아의 시인, 사디(Abū-Muhammad Muslih al-Dīn bin Abdallāh Shīrāzī, Saʽdi, 1209~1291)의 명성은 유려한 표현, 소박한 문체,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닌 시를 썼다는 데에 있다. 그의 작품을 필사한 수많은 원고, 여러 언어로 출간된 셀 수 없이 많은 번역본,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수십 건의 판본, 여러 건의 비평과 판본, 연구 논문과 보고서 등은 시간이라는 개념에 구애 받지 않는 위대한 시인 사디의 영향력을 증언한다.

페르시아의 시와 문학 분야에 있어 사디는 가장 명확하고 유창한 달변가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지난 8세기 동안 그가 남긴 우화, 격언, 전범(典範), 시는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명언이나 지혜의 말로 수없이 반복되어 사용되어 왔으며 그의 식견은 우리 시대 가장 박식한 학자들에게 깨달음을 주었고,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수많은 시인들이 사디의 공기를 숨쉬고, 사디에게서 영감을 받았으며, 각자의 문화에 사디를 통해 새로운 생기와 의미를 불어넣어 왔다. 사디라는 페르시아의 불꽃은 그렇게 스스로 빛나며 세상을 밝히고 있다.

에머슨(Emerson, 1803~1882)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디는 페르시아어로 말하지만 호머,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만벨과 유사하며 그의 언어는 항상 정갈하며 모든 민족에게 호소력을 지닌다고 하였다. ‘쿨리야트(Kulliyat, 시 전집을 뜻함)’라고 알려진 사디가 남긴 작품은 지혜의 보고이자 하나의 지식 패러다임으로서 그 독창성은 시간이 멈추는 그날까지 보존될 것이다.

세계적 중요성 · 고유성 · 대체 불가능성 :
페르시아어와 문학은 이란 문화가 지닌 자비심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으며 세계인들은 이러한 특징을 사디의 저술 속에서 직접 보아왔다. 그가 살았던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사디의 작품이 널리 읽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같은 사실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디는 『굴리스탄(Gulistān, 장미 정원)』서문에‘사디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폭넓게 알려져 있어서 사람들이 황금을 쫓듯 그의 문장을 쫓는다’고 하였고 또 다른 일화에서는 사디의 시가 중국 신장(新彊)의 도시 카슈가르에서도 유명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슬람력 660년(서기 1261년), 아랍어 번역자이자 학자였던 이븐 알 푸와티(Ibn al-Fuwaṭī)는 사디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아랍어 시 샘플을 요청했다. 비잔티움에서는 사이푸 을딘 푸르그하니(Sayfu’ldīn Furghānī)가 사디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사디의 작품을 번역하고, 그의 뒤를 따르기도 했다. 아제르바이잔 지방에서는 몽골 일한국(Ilkhanate) 통치자들의 수도였던 타브리즈(Tabriz)에서 후맘-이 타브리지(Humām-i Tabrīzi)가 사디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의 문체를 모방했다.

이와 유사하게, 사디가 세상을 떠나기 전 몇 해 동안, 혹은 세상을 떠난 직후 아미르쿠스라브 데흘라비(Amīrkhusraw Dehlawī)와 아미르 하산 시주지(Amīr Ḥasan Sijzī)가 사디를 칭송했던 것 역시 인도 아대륙에서 드높았던 사디의 인기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1348년 사디가 세상을 떠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모로코의 유명한 여행가 이븐바투타(Ibn Baṭūṭa)는 그의 여행기에서 한 중국인 가수가 사디 시 구절을 암송하더라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사디는 세상을 떠난 후 두 곳의 거대한 이슬람 제국, 즉 아나톨리아와 발칸의 오스만 제국과 인도의 무굴 제국에서도 독보적인 인기를 누렸다.

파르시어(Farsi, 페르시아어)는 역사적으로 언제나 인도 아대륙의 문화표현 수단이었고 사디의 『굴리스탄』과 『부스탄(Būstān, 과수원)』은 파르시어를 배울 때 가장 중요한 교과서 역할을 해왔다. 이란력 1363년(서기 1984년) 인도에서 출간된 사디 작품의 목록은 어머 어마한 양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만 보아도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인도에서 사디의 드높은 인기와 깊은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사이이드 아리프 나브스하히(Sayyid ʽArif Nawshāhī)가 작성한 전체 목록에는 총 190판본의 『굴리스탄』, 145판본의 『판드나마(Pandnāma, 혹은 야 카리마(yā Karīmā), 조언의 책』, 134판본의 『부스탄』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몇 가지 선집 · 번역본 · 어휘집 · 비평집 등을 더한다면 『굴리스탄』은 302본, 『부스탄』은 179본, 『판드나마』는 176본으로 늘어난다.

인도 아대륙에서 사디의 작품이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늦은 시기였는데, 초기 번역의 주요 관심이 페르시아어로 저술한 원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일단 번역 작업이 시작된 후에는 우르두(Urdu)어 · 신드(Sind)어 · 펀잡(Punjab)어 · 구자라트(Gujarat)어 · 파슈툰(Pashtun)어 · 벵갈어 · 산스크리트어 등으로 쓰인 수많은 연구 논문과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굴리스탄』은 지금까지 우르두어로 29회 번역되었으며, 러크나우(Lucknow)에서 번역된 31번째 판본이 이슬람력 1301년(서기 1883년)에 출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인도의 여러 지방에 있는 최소한 40개 이상의 도시에서 사디의 작품이 간행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 내에서도 사디의 작품, 특히 『굴리스탄』과 『부스탄』은 대중으로부터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굴리스탄』을 최초로 터키어로 번역한 것은 사디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이푸 을딘 푸르그하니(Sayfu’ldīn Furghānī, 이슬람력 705년(서기 1305년경) 사망)였다. 금세기에도 터키어 번역본은 새롭게 계속해서 출간되고 있다. 이런 번역본 이외에도 수디(Sūdī), 스함이(Shamʽī) 등이 포괄적인 『굴리스탄』비평본을 펴냈는데 이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사디 작품의 중요성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다.

파르시어를 중요한 문화교류의 수단으로 삼았던 두 거대 이슬람 제국의 국경을 넘어, 사디의 명성은 서반구에까지 알려졌으며, 『굴리스탄』은 파르시어로 쓰인 책으로는 최초로 유럽어로 번역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들이 가장 사랑했던 시가 바로 사디의 시였다. 그들은 사디의 사상을 높이 평가했고 아름다운 표현에 매혹되었다. 1634년, 『굴리스탄』을 프랑스어로 최초로 번역한 사람은 앙드레 뒤 리에르(Andre du Ryer, 1580~1660)였다. 이렇게 해서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사디의 작품을 맛볼 수 있었고, 그로부터 1년 후인 1635년에는 프리드리히 옥센바흐(Friedrich Ochsenbach, 1606~1658)가 리에르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독일어로 중역하여 튀빙겐(Tübingen)에서 출간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란에서 파르시어를 배운 아담 올레아리우스(Adam Olearius, 1599~1671)가 이란인인 하크베르디(Ḥaqqwerdī)의 도움을 받아 『굴리스탄』을 독일어로 완역했다. 이 번역본은 1654년 슐레스비히(Schleswig)에서 출간되었다. 올레아리우스의 번역본은 매우 인기가 높아서 1660년, 1663년, 1671년, 1696년까지 재출간되었다. 그러는 사이 사디의 작품은 차츰차츰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 앙리 마세(Henri Massé, 1886~1969)의 유명한 책, 『서지목록에 따른 시인 사디에 관한 에세이(Essai sur le poète Saadi, suivi d'une bibliographie)』(파리, 1919년)에 따르면 『굴리스탄』 한 작품만도 총 55회 번역되었고 각 번역본은 수차례에 걸쳐 재출간되었다.

사디의 작품이 프랑스어 · 독일어 · 영어 등으로 수차례 번역된 것 이외에 『굴리스탄』을 최초로 각국어로 번역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라틴어본은 겐티우스(Gentius)가 1651년 암스테르담에서 펴냈고, 네덜란드어본은 다위스뷔르흐(J. V. Duisburg)가 1654년 암스테르담에서 펴냈고, 우르두어본은 미르 스히르 알리 아프수스(Mīr Shīr ʻAlī Afsūs)가 캘커타에서 1802년에 펴냈으며, 아랍어본은 1846년 알 무칼라(al-Mukhallaʽ)로 널리 알려진 크바자 지브라일 유수피(Khwāja Jibrāʽīl b. Yūsufī)가 이집트의 부라크에서 펴냈다. 러시아본은 나자리안(S. Nazariyān)이 모스크바에서 1857년에 펴냈고, 이탈리아어본은 나폴리에서 1873년 빈첸투스(Vincentus)가 번역했고, 터키어본은 물라 아사드 에판디(Mullā Asad Efandī) 본이 콘스탄티노플에서 1873년에 출간되었다.

폴란드어본은 카지미르스키 비베르스테인(Biberstein Kazimirski)이 파리에서 1876년에 펴냈고, 파슈토(Pashto)어는 헨리 조지 레버티(H. G. Raverty)가 런던에서 1880년에 펴냈다. 프로방스어본은 피아(L. Piat)가 몽펠리에에서 1888년에 번역 출간했고 슬라비아어본은 크림스키(Krimski)가 1894년에 번역했으며, 루마니아어본은 포페스쿠 치오커넬(G. Popesco Ciocanel)이 플로이에슈티에서 1905년에 번역 출간했다.

1927년 중국의 유명한 학자 전진도(Jen Jin Do)는 ‘세계문학사’의 한 장을 사디에게 할애하고, 그의 작품 중 몇 편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1948년에는, 진 자이 반(Jin Jay Van)이라고 알려진 중국인 무슬림이 『굴리스탄』을 처음으로 중국어로 번역했다. 1958년 사디가 『굴리스탄』을 편찬한 700주년을 기념하여 지안 푸 쉬베이(Jian Fu Shvei)가 또 다른 중국어 번역본을 출간했다. 1950년에는 오사카대학교 국제학회 의장인 사와(Sawa) 교수가 『굴리스탄』 무료 번역본을 출간했고, 1964년에는 도쿄대학교 국제학회 의장인 가모(Gamo) 교수가 『굴리스탄』 일본어 완역본을 출간했다.

시기는 다를지라도 사디의 모든 작품은 전 세계의 문화 기관을 통해서도 출간되었는데 여기서는 앙리 마세의 목록에 포함된 초기 간행본 몇 편만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굴리스탄』(암스테르담, 1651년), 『선집』(빈, 1778년), 『조언의 책』(캘커타, 1788년), 『쿨리야트(Kulliyyāt)』(캘커타, 제1편 1791년, 제2편 1795년), 『논문』(캘커타, 1791년), 『부스탄』(캘커타, 1824년) 등이다.

1791년 캘커타에서 『쿨리야트』가 출간되기 전까지 유럽에서는 『굴리스탄』과 『부스탄』의 저자로서만 사디가 알려졌고, 『굴리스탄』이외의 다른 작품은 출간되거나 번역되지 않았다. 캘커타에서 『쿨리야트』가 출간된 후에야 비로소 사디의 작품 대다수가 유럽의 주요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사디와 그의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는『굴리스탄』에 관한 에세이를 남겼고 볼테르(Voltaire)는 매우 정열적으로 『굴리스탄』을 연구했다. 바이런(Byron)은 사디를 가장 위대한 라틴어 서정 시인인 카툴루스(Gaius Valerius Catullus, 기원전 84~54년)에 견주었다.

괴테는 『굴리스탄』을 번역한 아담 올레아리우스를 칭찬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아담 올레아리우스는 충실하고 즐거운 번역을 통해 위대한 시인 사디를 독일 민족에게 소개했다.’

괴테는 『서동시집(西東詩集, West-Östlicher Divan)』에서 사디를 인용하여 찬사를 보냈는데 다음은 그 일부이다.

사디는 말한다.
ّ منت خدای را عز و جلّ که طاعتش موجب قربت است
و به شکر اندرش مزيد نعمت؛
هر نفسی که فرو می ّ رود ممد حيات است و چون بر میآيد مفرح ذات.
پس در هر نفسی دو نعمت موجود است و بر هر نعمتی شکری

In every breath we breathe two graces
The in draught and the outflow;
That is a toil, but this refreshment brings;
So marvellous are our life’s co-minglings,
Thank God when thou dost feel His hand constrain,
And thank when He releases Thee again.

괴테는 말한다.
Im Atemholen sind zweierler Gnaden:
Die Luft einziehen, sich ihrer entladen;
Jenes bedrängt, dieses erfrischt;

So wunderbar ist das Leben gemischt.
Du danke Gott wenn er dich preßt
Und dank ihm wenn er dich wieder entläßt

호흡에는 두 가지 축복이 있으니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는 것
들이마시면 몸이 움츠려졌다가 내쉬면 다시 홀가분해진다.
삶이란 이렇게 놀랍게 뒤섞여 있는 것
신께 감사하라, 신이 너를 힘들게 하더라도
또 신께 감사하라, 신이 너를 자유롭게 해주더라도

괴테는 독일어로 『굴리스탄』의 마지막 장을 인용함으로써 『서동시집』을 끝맺고 있다.

프리드리히 뤼케르트(Friedrich Rückert, 1788~1866)도 그의 시에서 사디를 칭송했다.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는 『동방 시집(Les Orientales)』에서 『굴리스탄』을 인용했다. 사디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장 드 라퐁텐(Jean de La Fontaine, 1621~1695), 장 프랑수아 드 생 랑베르(Jean François de Saint Lambert, 1716~1803), 롤랑 부인롤랑 부인(Madame Roland,1754~1793), 로렌초 피뇨티(Lorenzo Pignotti, 1739~1812), 오노레 드 발작(Honoré de Balzac, 1799~1850), 알프레드 드 뮈세(Alfred de Musset, 1810~1857), 유진 마누엘(Eugene Manuel, 1823~1901) 등 여러 작가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시인 제임스 톰슨(James Thomson, 1700~1748)은 사디의 비전, 연설, 감정에 완전히 이입되어 13세기 쉬라즈(Shiraz, 시인 사디의 고향) 조차도 가깝게 느꼈던 작가인 듯하다. 미국의 철학자 아모스 브론슨 알코트(Amos Branson Alcott, 1799~1888)는 사디의 작품을 소크라테스 · 플라톤 · 단테 · 셰익스피어 · 밀턴 · 괴테의 작품과 비교하기도 했다.

사디를 칭송하는 시를 쓰고 글을 남긴 사람들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프랑스의 철학자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 1823~1892)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사디는 우리의 화자 중 하나다.

영국의 시인 아놀드 에드윈(Arnold Edwin, 1832~1904)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디는 과거와 함께 현재에도 속한다.”

미국의 시인이자 작가인 에머슨(1803~1882)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디의 사랑 속에는 인간애가 있다. 그는 애정, 우정, 용기, 자비심, 관용, 친절, 순수 그리고 신성한 은혜의 시인이다……수 백 만의 영혼 중에서 사디의 영혼은 가장 돋보이며 독보적이다……그의 가슴속에는 빛나는 태양이 있어서 그가 하는 말을 통해 빛이 전달된다.”

미국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와 사디 사이에 중대한 차이점은 없는 것 같다. 그는 이란이라는 한 국가에 국한된 시인이 아니며 고대에만 속하는 시인도 아니다. 내게 그는 낯설지 않다. 그의 사상은 내 생각과 비슷하므로 그는 시간의 한계를 넘어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굴리스탄』이 폭넓은 인기는 이란과 인도, 오스만 제국의 여러 작가들이 『굴리스탄』을 모방하고 비슷한 스타일의 책을 펴내게 만들었다.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무이니-이이 주바이니(Muʽīnī-yi Juwaynī)의 『나가리스탄(Nagāristān)』, 자미(Jāmī)의 『바하리스탄(Bahāristān)』, 그하하니(Ghāʼānī)의 『파리스한(Parīshān)』등이 그렇다.

사디는 다른 누구보다 페르시아어를 보다 달콤하게, 보다 유창하게, 보다 풍부하게 만든 시인으로서 피르다우시(Ferdowsi)를 제외한 다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독보적인 인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디의 『쿨리야트』 [Kulliyyāt-i Saʽdi]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영/불어 원문))

......^^백두대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