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 /폴란드 /1573년 1월 28일의 바르샤바 동맹 : 종교적 관용 보장
[The Confederation of Warsaw of 28th of January 1573 : Religious tolerance guaranteed]
1573년 1월 28일의 바르샤바 동맹: 종교적 관용 보장
“유럽 내 다른 지역의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보면, 1573년 1월 28일의 바르샤바 동맹 선언문의 문안과 내용은 매우 특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200년 이상 그 공화국에서 이루어진 종교 생활의 규칙을 지배했다.”
노먼 데이비스(Norman Davies, 1939~, 역사학자)
야기엘로 왕조(Jagiellonowie, 1386~1572)의 마지막 왕은 정치제도의 개혁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1572년 7월 5일). 이러한 와중에 국왕의 자리가 궐위(闕位)할 때 국가를 효과적으로 운용할 법적 수단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야기엘로 왕조의 남성 계승자가 단절된 것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새롭게 강화된 루블린 동맹(The Union of Lublin)에 있어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었다. 특히 리투아니아에는 분리주의 경향이 팽배해질 것이며, 국가는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 우려되었다. 그렇게 되면 두 명의 통치자가 선출될 수도 있고, 적합하지 못한 후보를 선출할 경우 국가의 종교적 안정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바르샤바 동맹(Confederation of Warsaw)’의 승인은 이러한 국가의 정치적 위기 상황을 막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소위 ‘개혁파’라 불린 중간 귀족의 대표들은 기존 정책을 바탕으로 새로운 법적 제도를 마련한다면 그것은 시민 수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기존의 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이 어느 한 기관의 결정을 존중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같은 성격의 총회가 1573년 1월 바르샤바에서 개최되었고, 그곳에서 ‘바르샤바 동맹’은 승인되었다.
‘바르샤바 동맹’은 새로운 정치제도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으며, 그와 동시에 여러 세대에 걸쳐 서로 다른 민족적 배경(폴란드인·리투아니아인·러시아인·독일인·그루지야인·유대인)과 서로 다른 기독교 교파로 이루어진 사람들을 국가적으로 단결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사실 폴란드 왕국은 심지어 종교개혁 이전에도 서로 다른 교파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던 곳이었다. 모스크바와 오스만제국, 종교적 갈등에 휘말린 서유럽 사이에 놓여 있는 16세기 말 폴란드는 종교 생활에 있어서 극히 이례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때문에 추기경 호주시(Stanisław Hozjusz, 1504~1579)는 폴란드를 “이단자 보호시설이 있는 곳”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폴란드는 기독교를 믿는 다른 국가에서 과격한 종교 집단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찾는 피신처였다.
폴란드에서 재세례파(네덜란드의 메노파(Mennonites) 교도)와 삼위일체 반대파(아리우스파(Arians))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폴란드의 모든 종교 집단은 국왕의 뜻에 따라 관용을 향유할 수 있었다. ‘바르샤바 동맹’은 이 상황을 공식적으로 합법화하고, 모든 교파의 귀족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통치를 선보였다. 그것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Augsburger Religionsfrieden, 1555년)보다 훨씬 진보적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르샤바 동맹’은 절대주의와 종교적 갈등의 시기에 새롭고 독특한 돌파구를 마련한 조치라는 점에서 ‘바르샤바 동맹’의 승인은 민주주의의 획기적인 시도로 간주되어야 한다.
Photograph illustrating The Confederation of Warsaw 28th of January 1573
Photograph illustrating The Confederation of Warsaw 28th of January 1573
국가 : 폴란드(Poland)
소장 및 관리기관 : 바르샤바 중앙 역사기록원(Archiwum Główne Akt Dawnych w Warszawie)
등재연도 : 2003년
세계적 중요성·고유성·대체 불가능성 :
이 문서는 평등한 당사자들, 즉 가톨릭과 다른 교파(루터파, 칼뱅파, 동방정교회, 아르메니아파, 이슬람교) 간 타협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국왕이 내린 칙령은 아니었다. 이 문서는 당시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 오늘날 남아 있는 사본들 가운데는 폴란드의 왕위를 주장했던 프랑스 왕자 앙리 발루아(Henri Valois, 1603~1676)를 위해 프랑스어로 작성된 것이 있다. 이 문서를 바탕으로 작성되고 폴란드의 사절에 의해 파리로 전해진 「폴란드의 조건(Postulata Polonica)」은 프랑스의 샤를 9세(Charles IX, 1550~1574)로 하여금 위그노와 타협에 이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573년 6월 6일 ‘라로셸(La Rochelle) 화의’에 의해 마침내 프랑스의 제4차 종교전쟁은 끝이 났다.
현재 전해지는 이 문서의 인쇄본은 다음과 같다.
• 폴란드어 텍스트
「1550년과 1578년 사이에 국왕의 승인을 받은 헌법, 법령, 특권(Konstytucyje, statuta i przywileje na walnych sejmach koronnych od 1550 aż do roku 1578 uchwalone)」, 크라쿠프, M. 샤르펜베르크 1579.
• 옛 러시아어 텍스트
「리투아니아 대공의 법령집(Statuta Wielkiego Księstwa Litewskiego)」, 빌뉴스 1588.
• 독일어 텍스트
「폴란드 전체의회의 동맹조항(항목) : 1573년 방어적인 공위(궐위)기간에 바르샤바의 일반의회에서 체결되었고 공개적으로 아주 진지하게 확고히 지키기로 서약된 조항(Confoederations Articul der Gesambten Polnischen Reichs Staende, welche anno1573 bey werherndem Interregno auff allegemeinen Landtage zu Warsaw geschlossen und unverbruechlicher Festhaltung offentlich und gantz eyferig beschworen worden)」, 17세기 초
바르샤바 동맹이 유네스코의 후원 아래 출판된 인류사 소사(小史)에 언급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1573년 1월 28일의 바르샤바 동맹 : 종교적 관용 보장 [The Confederation of Warsaw of 28th of January 1573 : Religious tolerance guaranteed]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영/불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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