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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 /도미니카 공화국 /노예 세례 기록부(1636~1670)(185)

eorks 2019. 12. 4. 00:12

세계기록유산 /도미니카 공화국 /노예 세례 기록부(1636~1670)
[Book for the Baptism of Slaves (1636~1670)]

노예 세례 기록부

노예 세례 기록부

노예 세례 기록부

Book for the Baptism of Slaves (1636-1670)


국가 : 도미니카 공화국(Dominican Republic)
소장 및 관리기관 : 도미니카공화국 산토도밍고 대교구(大敎區) 역사기록보관소
등재연도 : 2009년
1635년~1670년의 노예 세례 기록부(Book for the Baptism of Slaves)는 산토도밍고(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 대교구의 역사기록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다. 17세기의 유서 깊은 기록으로서 도미니카 공화국의 기독교 역사에서 유일하고도 특이한 자료이며, 이것은 17세기에 아메리카 대륙, 특히 산토도밍고 섬의 동쪽에 위치한 같은 이름의 항구에서 이루어진 노예제의 형태, 특성 및 기타 세부적인 사항을 알려 주는 귀중한 정보 자료이다.

산토도밍고 섬, 즉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은 1492년에 시작된 아메리카의 발견과 정복, 식민지화 과정의 출발점이었다. 처음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이 섬에 들어온 것은 1493년이었지만, 노예 무역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510년대였다. 초기에는 개별 허가를 얻어, 그다음에는 ‘아시엔토(asiento)’라는 수입 허가권으로 잘 알려진 포르투갈의 무역 기관을 통해 진행되었다. 설탕 산업이 번창하여 신대륙에서 최초의 대농장 제도가 자리를 잡으면서 노예 인구가 확연하게 증가하였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원주민 노예들과 카리브 해 연안 지역이나 앤틸리스 제도(Antilles islands), 심지어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붙잡힌 포로들과 함께 노예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그들을 대신하였다. 16세기 중반부터 아프리카 노예들이 히스파니올라 섬 전체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카보베르데(Cabo Verde)의 섬들과 기니 만(Gulf of Guinea) 인접 해안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16세기 초에 벌써 노예들은 무장 폭동 등의 형태로 노예 제도에 반대하여 저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특수한 저항 방식은 이른바 ‘시마로나도(cimarronado)’라는 것이었는데, 그들이 소속되어 있던 농장을 떠나 ‘마니엘(maniell)’이라고 하는 은밀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그곳에서 전 주인의 집을 습격하는 것이었다.

아프리카 흑인들의 이러한 공격으로 사탕수수 농장이 불타서 파괴되고 동물들이 몰살당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다른 노예들도 이에 가담하여 이전 동료나 주인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시마로나도’는 사탕수수 대농장 제도가 거의 끝났던 16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점차 근절되었지만, 완전하게 근절되지는 않았다. 빈도가 줄어들긴 했지만 노예 반란의 강도는 여전하였고, 에스파냐 사람들과 원주민 지주들의 불안과 공포도 여전히 팽배하였다.

17세기에는 에스파냐의 적들이 외부에서 공격하여 거의 항존하는 듯한 내부 공격 세력과 합세하였다. 그로 인해 당국은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에 위치한 ‘마니엘’의 노예 반란자들을 빈번하게 공격하였다.

17세기 중엽, 섬의 남서쪽에 위치한 오코아 마니엘(Ocoa Maniel)에 대한 공격은 잘 알려져 있다. 이 공격은 1655년 영국의 침공에 맞서 섬을 방어하여 유명해진 다미안 델 카스티요(Damian del Castillo) 대위가 지휘하였다. 세례 기록부에는 이 공격 때 잡힌 24명의 어린이들만 언급되어 있으며, 그 당시 언급된 유일한 책임자는 후안 데 비얄로보스(Juan de Villalobos) 대위였다.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무렵에 ‘시마로나도’는 마침내 다른 저항 방법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노예 주인이 노동 계약을 지키지 않았을 때 노예가 법원에 출두하여 자유를 요구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에도 자유민들이 증가하였다.

세계적 중요성·고유성·대체 불가능성 :
이 기록부는 분명히 대교구 역사기록보관소의 컬렉션 중에서도 아주 특별하다. 도미니크 공화국의 기독교 기록물에 이와 유사한 기록부는 없다. 실제로 쿠바의 교구 기록보관소에서는 1665년부터 시작하여 에스파냐 정부가 이전의 모든 기록을 폐기하라는 명령을 내린 1881년까지 노예들의 세례·견진성사·결혼·장례에 관한 각각의 기록을 보관하고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유산으로 지정된 이 기록부는 에스파냐 식민 통치기에 산토도밍고 섬에 있었던 유일한 기록부이다. 이 기록부는 1670년 9월 29일자로 끝나 있는데, 그 이후 산토도밍고 대성당의 세례 기록부는 통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날짜부터 1822년 노예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두 식민지(아이티와 산토도밍고)를 정치적으로 통합하면서 이 교구는 자유민과 노예를 등록하는 데 하나의 기록부만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예 세례 기록부(1636~1670) [Book for the Baptism of Slaves (1636~1670)]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영/불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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