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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ives of the University of Leuven (1425-1797): University Heritage of Global Significance]
The Archives of the University of Leuven (1425-1797): University Heritage of Global Significance
루뱅대학교의 기록물(1425~1797) : 세계적으로 중요한 대학교 유산
루뱅대학교의 기록물(1425~1797) : 세계적으로 중요한 대학교 유산
루뱅대학교의 기록물(1425~1797) : 세계적으로 중요한 대학교 유산
루뱅대학교의 기록물(1425~1797) : 세계적으로 중요한 대학교 유산
루뱅대학교의 기록물(1425~1797) : 세계적으로 중요한 대학교 유산
국가 : 벨기에(Belgium)
소장 및 관리기관 : 벨기에 국립기록보관소(State Archives in Belgium), 루뱅대학교 기록관(KU Leuven (University of Leuven))
등재연도 : 2013년
‘대학교(University)’는 고등 교육과 학문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서 널리 알려지고 공인되어왔다. 대학교는 학부 단위로 나뉜 학과들로 이루어져 있는 특정한 형태로 전 세계적으로 동일한 양식으로 발달했다. 대학교는 12세기~13세기 사이에 서유럽에서 먼저 등장하여, 중세에 이르러 더욱 발달하였고, 16세기부터는 유럽 식민지까지 확산되었다. 1538년 아메리카에서는 최초로 산토도밍고대학교가 생겼고, 아시아에서는 1611년 최초로 마닐라대학교가 생겼으며 이후 19세기에 비로소 전 세계에 대학교가 생겨났다. 대학교는 오늘날 세계 지적 유산을 대표하는 가장 강력한 전범(典範)이다.
16세기에 설립된 루뱅대학교(University of Leuven)는 알프스 이북 지역의 대학교 중 파리대학교 다음으로 규모가 컸다. 또한,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헤라르트 메르카토르(Gerard Mercator, 1512~1594)·유스튀스 립시위스(Justus Lipsius, 1547~1606) 등과 같은 저명한 철학자들이 이곳에 머물렀으므로 루뱅대학교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것은 당연했다. 1517년 ‘콜레기움 트릴링궤(Collegium Trilingue, 프랑스어 이름: Collège des Trois-Langues)’의 설립은 인본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루뱅대학교는 인쇄술과 지도 제작법의 초기 발전에 기여했으며 또한 가톨릭 개혁을 시도함으로써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훌륭하게 보존된 문화유산인 대학 건축물 자체만으로도 루뱅대학교(1425~1797)는 이미 세계에 미친 영향력의 크기를 확인할 수 있지만 루뱅대학교가 지니는 사회적 의미와 중요성을 보여주는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는 바로 일렬로 세우면 거의 200m 길이에 가까울 정도로 방대한 ‘루뱅대학교의 기록물’이다. 이 기록물은 그동안의 다사다난했던 루뱅대학교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앙시앙 레짐(Ancien Régime, 프랑스혁명 이전 절대왕정체제) 이전부터 만들어졌던 기록물 중 일정한 특징을 고르게 유지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대학 기록물이다.
루뱅대학교의 기록물은 오직 몇몇 기록물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근대 초기 대학교의 사실적인 모습을 지적·사회적·종교적·문화적 수준에서 철저히 통찰할 수 있도록 해준다. 단과대학·해부실·식물원과 같은 대학교 내의 고전적 기반시설에 대한 통찰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대학 법정이나 맥주 및 와인 저장고의 관리 등에 대한 식견도 제공하고 있다. 이 모든 부속 기관들은 잘 정렬된 동질의 기록들을 유산으로 남겨놓았다. 이들 기록물들은 대학의 운영 원리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학생과 교수, 그리고 보다 광범한 사회와의 상호 작용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세계적 중요성·고유성·대체불가능성 :
서양 대학교의 발전이라는 맥락에서 보았을 때 루뱅대학교의 역사는 전형적인 동시에 고유하다. 전형적 특징은 2세대 대학교 설립의 물결에서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볼로냐대학교·파리대학교·옥스퍼드 대학교 등으로 대표되는 1세대 대학교는 ‘설립’된 것이 아니라 기존 학교가 어느 순간 ‘스투디움 제네랄레(studium generale, 모든 지역에서 학생을 수용하는 형태의 교육기관)’로서 공인받음으로써 자연스럽게 발전하였다. 약 1350년부터 1450년에 건립된 2세대 대학교들은 주교나 군주, 또는 지역별 시 당국의 주도 하에 설립되었다. 예를 들면 1388년 쾰른(Köln)대학교와 1425년 루뱅대학교가 그렇다. 이탈리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대학교들이 그러하듯이, 루뱅대학교 역시 파리대학교를 모델로 삼아 조직되었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동안 루뱅대학교가 보여준 다음과 같은 모습은 세계사적으로 본보기가 될 만하다. 루뱅대학교는 대학교는 물론이고 단과대학·장학제도·학생 조합 등 대학 내 부속기관 등의 발전을 이룩했으며, 본래는 온전히 성직자들만의 영역이었던 대학교에 국가 영향력이 증대된 사례이며, 전체적으로 서양 기독교의 부속 기관이라고 할 수 있었던 대학교가 국가 기관 중 하나로서 새롭게 발전했으며, 이러한 발전 과정 중에 프로테스탄트 및 가톨릭 종교개혁에 대학교가 일정한 역할을 했으며, 르네상스 인본주의·과학 혁명·계몽주의 등의 혁신과 중세 전통 사이에서 갈등이 있을 때마다 대학교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한편, 루뱅대학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유하고, 국제적인 차원에서 중요하다. 유럽의 다른 대학교 중에서 루뱅대학교처럼 전형적인 중세의 대학 면책특권이 이 정도 수준으로, 특히 사법 분야에서 발달한 사례가 없었다. 또한 유럽 내의 어느 대학교에서도 이렇게 많은 단과대학을 설립한 사례가 없다. 더불어 세계에서 보기 드문 ‘가톨릭’ 대학교로서 루뱅대학교는 17세기와 18세기 동안에 세계의 많은 학생들을 모집하여 지속적으로 교육해왔다. 16세기 초, 이미 루뱅대학교의 학생 수는 파리대학교를 제외한 알프스 북쪽에 있는 다른 모든 대학교를 추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517년 에라스무스의 친구인 예룬 판뷔슬레이던(Jeroen van Busleyden, 1470~1517)의 후원으로 대학교 내에 비공식 기관인 ‘콜레기움 트릴링궤’가 설립되자 이후 루뱅대학교는 르네상스 인본주의의 교두보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콜레기움 트릴링궤는 후에 ‘콜레주드프랑스(Collège de France)’를 비롯한 다른 기관들의 모델이 되었다. 이 기관으로 인해 루뱅대학교에는 유럽 전역에서 온 학생들과 학자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수학의 르네상스를 맞은 덕분에 루뱅대학교는 지도제작법과 악기 제작에 있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519년 쾰른대학교와 함께 루뱅대학교는 심지어 교황이나 독일 의회(Diet)보다 앞서 루터(Luther)의 사상을 비판한 최초의 기관이었다. 루뱅대학교의 신학자들은 가톨릭 종교개혁을 위해 ‘색인, 가톨릭 신앙 고백, 성경의 공인 번역’등의 발전을 이루었고, 훗날 이러한 것들은 전체 가톨릭교회에 채택되었다. 한 세기 내내 가톨릭교회를 지배했던 얀센파와 반얀센파 사이의 논쟁은 루뱅대학교에서 처음 비롯되었다.
요제프 2세(Joseph II) 황제의 개혁 정책에 대한 거센 저항과, 1789년~1790년의 브라반트 혁명(Brabant Revolution)에서 루뱅대학교의 고유한 정치적 역할은 19세기~20세기 민족 혁명이나 반식민혁명에서 여러 세계의 대학들이 해냈던 역할의 서곡이었다.
루뱅대학교 역사에 길이 남을 여러 사건들과 면면들은 기록물과 함께 그대로 문서로 남아 있다. 루뱅대학교 기록관(KU Leuven (University of Leuven))의 기록물은 대체불가능하며 그 고유성은 근본적으로 모든 기록이 동질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이 반드시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이토록 다사다난한 역사를 지나오면서 루뱅대학교의 옛 기록물을 비교적 원형 그대로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사실 어쩌면 이렇게 완전하게 보존되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1914년 8월 25일, 독일군 군대가 고의적으로 루뱅대학교의 도서관에 불을 질렀을 때 전 세계는 경악했다.
수천 편의 귀중한 필사 원고와 책들이 화염 속에서 타들어갔다. 그러나 대학교 기록물은 설립 칙서와 몇 권의 등록부만 소실되었다. 당시 거의 모든 기록물은 다른 장소에 보관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공화국이 기록물들을 일부 징발하면서 기록물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보관되었기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기록물의 완전한 소실을 막을 수 있었다. 이처럼 특별히 지난했던 역사만 보더라도 이 기록유산의 상징적 가치는 매우 크다. 이 기록유산은 뢰번에 있는 벨기에 국립기록보관소(State Archives in Belgium), 루뱅대학교 기록관에 소장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루뱅대학교의 기록물(1425~1797) : 세계적으로 중요한 대학교 유산 [The Archives of the University of Leuven (1425-1797): University Heritage of Global Significance]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영/불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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