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 /폴란드 /15세기 중엽부터 18세기 말까지 폴란드 왕국(또는 폴란드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체결된 평화협정문(아히드나메)
[Peace treaties (ahdnames) concluded from the mid-15th century to late-18th century between the Kingdom (or Republic) of Poland and the Ottoman Empire]
국가 : 폴란드(Poland)
소장 및 관리기관 : 바르샤바 중앙 역사기록원(Archiwum Główne Akt Dawnych w Warszawie)
등재연도 : 2013년
바르샤바(Warsaw)에 있는 중앙 역사기록원(Archiwum Główne Akt Dawnych) 왕실기록관(Royal Archives)의 터키 섹션에는 30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서 작성된 약 1,500건의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이 문서들은 전통과 종교가 서로 다른 이웃한 두 국가가 수 세기 동안 직접적으로 교류하였음을 증명하며, 헝가리 왕국이 오스만 제국과 주고받은 모든 종류의 접촉에 대한 연구를 도와주는 방대한 양의 중요한 사료이다. 그 내용은 중세 후기부터 근대 초기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특출한 정보를 지니고 있다. 양국이 체결한 ‘평화협정문(Ahidnâme, 아히드나메)’은 국제 관계에서의 상호 인정과 보편적 가치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중요한 시기는 술레이만 1세(Süleymann I, 1494~1566, 16세기 전반)와 동시대인들, 그리고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2명의 통치자인 지그문트 1세(Zygmunt I, 1467~1548)와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Zygmunt II August, 1520~1572)의 시대이다. 양국의 지도자들은 활발한 교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1533년 이들이 체결한 ‘무기한 평화 협정(eternal peace)’은 근대적 외교 정책을 향하여 내디딘 결정적인 한 걸음이었고, 이것은 약 1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술레이만 1세의 아내인 록셀라나(Roxelana, 1500~1558)와 그의 딸인 미흐리마흐(Mihrimah, 1522~1578)가 폴란드 왕에게 보낸 서신들은 전 세계적으로도 지극히 희귀한 문서이다. 더불어 정확한 양식, 외양, 크기(길이 약 4m 이상) 등을 갖춘 특징적인 술탄의 발급 문서, 술탄의 장식들, 채색 봉인(tughra) 등도 주목할 만하다.
세계적 중요성·고유성·대체불가능성 :
300년이 넘는 오랜 세월에 걸쳐 다량의 다양한 문헌을 보관하고 있는 바르샤바 왕실기록관의 터키 섹션은 중세 후기부터 근대 초에 이르는 역사와 문화의 관점에서 매우 특별하다. 서로 다른 지역 및 정치·사회·경제 시스템을 가진 두 나라가 서로 경쟁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했던(17세기 후반의 짧은 전시를 제외하고) 시기를 보여주는 이들 문서는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유럽의 정치사 및 세계사에 있어서 특별한 한 장면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와는 별도로, 이슬람 세계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감안할 때, 술레이만 1세의 아내인 록셀라나가 지그문트 아우구스투스 왕에게 보낸 서신이나 술탄의 딸인 미흐리마흐가 보낸 서신도 매우 특별하고 지극히 희귀한 컬렉션이다.
터키 섹션에 포함된 여러 문서들은 근대사에서 정치와 외교의 중요성과 긍정적인 역할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에우워(Kazimierz IV Jagiellończyk, 1427~1492)부터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Michał Korybut Wiśniowiecki, 1640~1673)에 이르기까지 역대 폴란드 왕들이 터키를 상대로 보여준 노련한 정치 덕분에 무력 충돌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1526년 크라쿠프(Kraków)에서 헝가리 왕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당한 모하치(mohácsi) 전투의 패배는 논리적인 결론을 이끌어내게 해주었다. 즉, 폴란드 왕국은 당시 최적의 영토를 차지하고 유럽 국가들 중 가장 중요한 국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터키와 폴란드 사이의 힘의 불균형은 향후 전쟁을 초래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쟁은 피해야 했다. 전쟁에 비해 ‘외교’를 통한 관계는 양국 모두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다. 폴란드와 터키의 외교술은 이와 같은 힘의 균형 유지를 위한 어려운 사안에 맞서 이루어진 눈부신 발전이었다. 1533년 체결된 최초의 ‘무기한 평화 협정’은 양국 국왕, 지그문트 왕과 술탄 술레이만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지속되었다. 본질적으로 ‘무기한 평화 협정’은 일시 정전을 위한 조약 체결이라는 이전의 개념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또 한 쪽은 이슬람 국가이고 다른 한 쪽은 기독교 국가인 양 당사국은 무력 갈등이 아닌 영원한 평화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술탄과 그의 아내, 휘렘(Hürrem, 록셀라나의 별명)이 부친상을 당한 지그문트 아우구스투스에게 보낸 애도 서한은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훌륭한 증거이다. 약 150년의 오랜 시간 동안 폴란드와 터키 사이에는 단 한 차례 전쟁이 발발하였고, 그것도 ‘제1차 호침 전투(First Battle of Chocimiem, 1621년)’와 함께 종전하였다. 평화는 전반적으로 폴란드에 우호적이었던 술레이만 1세 시대의 오스만 제국에서만 유지되었던 것은 아니고 술레이만 1세의 후계자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에 극적인 변화가 생긴 것은 폴란드와 터키 사이의 군사행동이 거의 끊일 날이 없었던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이러한 갈등을 종식하고자 체결된 ‘카를로비츠(Karlowitz) 조약’(1699년)은 이전의 평화 관계를 복구하려는 의도에서 시도되었지만, 중앙과 동유럽에서의 수정된 힘의 분배라는 새로운 상황이나 강대해진 러시아가 터키를 위협했던 상황 때문에 기존의 평화 조약과는 그 의미가 달라졌다.
컬렉션에 포함된 문서들은 양국이 종교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했던 폴란드와 터키 지배층이 보여준 매우 현대적인 외교적 접근법을 증언한다. 1533년 ‘무기한 평화 협정’은 이처럼 선도적인 의미를 갖는다. 유럽 내에서는, 그로부터 거의 1세기 후에야 비로소 종교적 논쟁을 극복한 최초의 국제 조약으로 평가되고 있는 ‘베스트팔렌 조약’(1648)이 체결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15세기 중엽부터 18세기 말까지 폴란드 왕국(또는 폴란드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체결된 평화협정문(아히드나메) [Peace treaties (ahdnames) concluded from the mid-15th century to late-18th century between the Kingdom (or Republic) of Poland and the Ottoman Empire]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영/불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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