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는 말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있어 사람들이 모이므로 저절 로 길이 생김. 덕 있는 자는 잠차코 있어도 그 덕을 사모하여 사람들이 따른 다.
전한(前漢)의 장군 이광(李廣)은 농서 사람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무예, 특히 활쏘기에 뛰어나 기원전 166년에 흉노가 침입 해 왔을 때 그 격퇴에 힘썼다. 그 후로 자주 전공을 세워 북쪽 변경이 태수가 되었다. 흉노는 그를 존경하고 두려워하여 이 장군의 이름만 들어도 감히 침공해 오지 못했다. 그의 용병은 알기 쉬웠으며, 부하를 사랑 하였으므로 모두가 기꺼이 그의 지휘에 따랐다. 행군 중 물이나 풀이 있으면 부대를 쉬게 하고, 소수의 정찰병을 보낼 뿐이었다. 기원전 121년, 4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출전했을 때 4만의 흉노군 에게 포위당했다. 그는 부하에게 명하여 원형의 진을 만들게 하고 자기도 강궁을 가지고 적에게 화살을 퍼부었다. 화살이 떨어져 가 므로 부하들은 당황했지만, 그는 침착하게 적의 부장을 쏘아 쓰러 뜨렸기 때문에 흉노는 두려워서 근접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 진 영을 굳게 지켜 원군에게 구출되었다. 그는 선전했으나 부하를 많 이 잃어 후(候)에 봉해지지 않았다. 뒤에 대장군 위청(衛靑), 곽거병 (藿去病)이 출진할 때 종군할 것을 원했으나 무제(武帝)는 그의 노 령을 염려했다. 그러나 재삼 요청하므로 무제는 하는 수 없이 이광을 위청의 한 부장(部將)으로 임명했다. 위청은 명령대로 그를 우장군으로 종군 케하고, 동쪽 길을 가게 하여 막북(漠北)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광은 도중에 길을 잃는 등 애로가 많아 기한 안에 당도 하지 못했다. 흉노에게 애먹고 있던 위청은 이광을 의심하고, 무제 에게 그를 벌하라고 상주했다. 그는 모든 죄는 자기에게 있다며 부 하를 감싸고 병사로 돌아와 '60이 넘어 심판을 받는 치욕은 견딜 수 없다"며 자결했다. 그의 죽음을 듣고 장병은 물론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桃李不言 下自成蹊" 라고 그를 절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