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 /영국 /「솜 전투」 필름(97)

eorks 2019. 9. 8. 06:17

세계기록유산 /영국 /「솜 전투」 필름
[The Battle of the Somme]
    1916년에 촬영된 「솜 전투(The Battle of the Somme)」 필름은 제1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투 가운데 하나를 다룬 뛰어난 다큐멘터리 기록물로서 고유한 중요성을 지닌다. 「솜 전투」 필름은 20세기 역사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획기적 사건의 다양한 측면을 전형화한 기록물이다. 또 이 영상 필름은 세계 곳곳에서 만들어진 장편 전쟁 다큐멘터리 영화 중 최초의 것으로서 특별히 중요하며, 다큐멘터리 선전 영화의 방법론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이 영화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사실 영화’의 윤리적 문제에 관한 수많은 논쟁을 촉발시켰다.

    「솜 전투」는 배급되자마자 한 달 안에 수백만 명의 영국 시민들이 관람했고, 당시 민간인 관람자들은 이 영화를 통해 최전선에 있던 군인들의 경험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총력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고, 당시 영국 시민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러시아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및 중립국의 많은 사람들도 이 영화를 관람했으며, 당시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전 세계에 걸쳐 제1차 세계대전과 영국의 참전에 대한 견해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 영화는 90년이 지난 뒤에도 흔히 사용되고 있는,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 전투를 상징하는 많은 영상의 출처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 필름은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Imperial War Museum) 필름 컬렉션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이 영상 필름을 보전함으로써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 필름 기록 보관소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국가 : 영국(United Kingdom)
소장 및 관리기관 :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The Imperial War Museum)
등재연도 : 2005년
세계적 중요성·고유성·대체 불가능성 :
이 기록물의 중요성과 특별함을 규명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는데, 그중 대부분은 전문가들과 주고받은 서신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 장르로서 다큐멘터리 영화
다큐멘터리 기록 매체로서 영상 필름이 지닌 잠재적 가치는 미래를 예측하는 탁견을 지닌 여러 저서에서 일찍부터 ‘영화의 역사’로 인정받았다. 특히 볼레슬라프 마투셰프스키(Boleslaw Matuszewsk, 1856~1943)는 1898년 3월 25일 파리에서 출간한 『역사의 신기원(Une nouvelle source de l’histoire)』에서 그 가치에 대해 언급했다. 일찍이 영화의 역사로서 인정받고, 다큐멘터리 영화로서도 지속적으로 중요성을 인정받았으나(예를 들면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최우수 다큐멘터리’라는 수상 부문이 있다) 아직까지 세계기록유산에는 다큐멘터리 영상 필름이 등재된 적이 없다. 그러나 「솜 전투」 필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영상 필름이라는 장르 ‘최초’로 기록유산에 등재될 만하다.

• 사실 기록으로서의 「솜 전투」
영국 국방부가 최전방에서의 촬영 전면금지를 완화한 지 6개월 후, 2명의 ‘공무원 촬영기사’가 찍은 「솜 전투」 필름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 여름, 서부전선에서 영국군이 개시한 공격에 대한 다큐멘터리 기록이다. 피터 심킨스(Peter Simkins) 교수는 “영국과 영연방의 관점에서, 1916년 솜 공격은 대영제국에서 시민군이 참전한 최초의 큰 전투였다. 수치상으로도 영국과 영연방 군대는 솜에서 단일 전투사상 최대 사상자를 냈다. 전투 첫날인 1916년 7월 1일에 입은 손실은 영국의 전 역사에 있어서 단 하루 동안 영국군이 입은 최대의 손실이었다. 1916년 7월에 서부전선에서 영국군은 지원군이었으며, 마을과 도시, 농촌 지역과 강하게 연대를 이루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므로 그 전투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은 가정은 거의 없으며, 그 결과 집단 심리에 영원한 상처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전 민족의 기억에 특별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라고 했다.

‘영국 군대의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24시간의 전투’라고 불린 이 전투에서는 57,47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산되는데, 사망자가 19,240명에 부상자가 35,493명이었다. 당연히 공식적인 선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전쟁 참사의 규모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솜 전투에서 일어난 실제 죽음은 관람자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교훈을 주었다.

• 대중의식의 한 현상으로서의 「솜 전투」
「솜 전투」 필름은 전투가 있은 지 약 한 달 후인 1916년 8월 2일에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에게 비공식적으로 먼저 공개되었다. 8월 10일에 공식적으로 시사회가 열렸고, 10일 후 런던에서 일반에게 개봉되었다. 당시 인기는 놀라울 정도였다. 개봉된 지 6주 만에 무려 2,000만 명이 관람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 영화는 당시 후방의 시민 관객들이 최전선에 있는 군인들의 경험을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인식 때문에 예전에는 영화를 하층민의 오락물로 여기며 경시하던 많은 사람들까지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으로 몰려들었다. 로이드조지의 비서이자 정부였던 프랜시스 스티븐슨(Frances Stevenson, 1888~1972)은 8월 2일에 이 영화를 보았고, 자신의 남자형제 폴(Paul)이 그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우리나라 남성들이 전장의 참호에서 나와 철조망을 뚫고 돌격하는 그런 용감한 장면을 보아서 기쁩니다. 우리의 용맹한 남성들이 전투 후 축 늘어진 채 무력하게 누워 있는 장면도 역시 있었습니다. 부상으로 생명이 위태로워 고통으로 일그러진 채 참호에서 나와 실려 가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니 폴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종 그가 어떤 일을 겪었을지 혼자 상상해 보려고 했었는데 이제는 그가 어떤 일을 겪었을지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비극을 겪은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연민과 공포를 마음속에서 몰아내려고 장중한 연극을 보러 무리지어 가던 시절에 느꼈을 그런 감정을 저도 느꼈습니다.”

로이드조지: 『프랜시스 스티븐슨의 일기(a Diary by Frances Stevenson)』에서 인용. A J P 테일러(Taylor) 편집, 런던, 1971

• 국경과 시간을 초월하여 관객에게 다가간 「솜 전투」
이 영화는 연합군의 참전 명분을 얻기 위해서 전 세계에서 널리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영국의 러시아 연합국의 군대와 민간인 사이에서 전쟁 지지를 결집시키기 위해 1916년과 1917년에 앨프리드 브롬헤드(Alfred Bromhead) 장군이 찍은 영화 중 하나이다. 또 여전히 중립을 지키던 미국에게 연합군에 대한 명분을 촉구한 영화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전 세계의 인식 형성에 도움을 주었고,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영화는 90년이 지난 뒤에도 흔히 사용되고 있는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 전투를 상징하는 많은 영상의 출처이기도 하다. 특히 이 영상 필름은 총력전과 영웅주의, 평범한 군인들의 고통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을 때 책·신문·텔레비전 등에서 여전히 널리 사용되고 있다. 영화에 나왔던 정지 화면들은 여러 언어로 출판된 수많은 책과 논문에 등장한다. 「대전(The Great War, BBC, 1964)」, 「제1차 세계대전과 20세기의 형성(The Great War and Shaping of the 20th Century, KCET for PBS, 1996)」, 「제1차 세계대전(The First World War, Wark Clements for Channel 4, 2003)」과 같은 텔레비전 시리즈와, 전 세계에서 제작된 셀 수 없이 많은 시리즈와 단편 프로그램들은 모두 전 세계 관객들에게 친숙한 「솜 전투」의 장면을 이용해 만들었다. 제프리 리처즈(Jeffrey Richards, 1945~ ) 교수는 자신이 쓴 글에서 ‘셀룰로이드(과거 영화필름에 썼던 물질)에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담아 그 이후 줄곧 전쟁에 관한 대중의 반응과 기억을 형성해 왔다.’고 표현했다.

• 다큐멘터리 영화/선전 영화의 모델로서의 「솜 전투」
「솜 전투」 영화는 다큐멘터리 기록물 그 자체로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첫 번째 장편 전쟁 다큐멘터리 영화로서도 중요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및 선전 영화의 방법론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여러 나라에서 만든 많은 후속 작품 속에 친숙한 하나의 스타일을 창조했다. 또한 이 영화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사실 영화’의 윤리적 문제에 관한 수많은 논쟁을 촉발시켰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개인의 비극적 장면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행위에 대해 쓴 영국 신문의 독자 투고는 즉각적으로 영화에 대한 논쟁에 불을 붙였다. 한편 1920년대에는 영화에서 ‘조작’되었거나 재구성된 장면에 대해 조사하거나 이런 행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 필름 보관소 설립을 위한 매개체로서의 「솜 전투」
이 영상 필름은 『역사의 신기원』의 저자와 같은 탁견을 지닌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 자극의 원천이다. 마지막으로, 이와 다시 연관을 지어 말하자면, 「솜 전투」는 그 자체가 영상 기록물 개념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성하다. 런던의 『타임스(The Times of London)』 는 1916년 8월 11일자 신문에는 이 영화에 관해 다음과 같이 게재 되었다.

‘영화라는 존재에 대한 정당성을 찾고 싶다면, 어제 스칼라 극장에서 비공개로 시사회가 있었고, 곧 세계 각지에서 상영이 될 이 멋진 영화에서 그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 이 영화는 7월 1일에 있었던 솜 전투에서 영국군의 공격에 대해 다룬 것이다. 향후 몇 년 이내에, 역사가들은 이 대공격 상황에 대해 알려고 한다면 이 영화를 보면 될 것이다. 대공격의 모든 상황이 그들의 눈앞에서 드러날 것이며, 수많은 사본들을 국립 기록보관소에 주의깊이 보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1920년에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을 공식적으로 설립하면서 이 필름을 소장하도록 한 것은 『타임스』지의 기사가 실현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1921년 박물관이 이 필름과 그 밖의 것들을 보존하기 위해 취한 조치는 최초의 필름 기록 보관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솜 전투」 필름 [The Battle of the Somme]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세계기록유산(영/불어 원문))

......^^백두대간^^........白頭大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