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事 成 語
분서갱유(焚書坑儒) 焚:불살을 분. 書:글 서, 坑:빠질 갱, 儒:선비 유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인다는 뜻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가혹한 법[苛法]과 혹독한 정치[酷政]을 이르는 말.
기원전 222년, 제나라를 끝으로 6국을 평정하고 전국시대를 마감한 진 나라 시황제 때의 일이다.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자 주왕조 때의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사상 처음 으로 중앙집권의 군현제도를 채택했다.
군현제를 실시한 지 8년이 되는 그 해어느 날, 시황제가 베푼 함 양궁의 잔치에서 박사인 순우월이 '현행 군현 제도하 에서는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기하기가 어렵다'며 봉건제도로 개체할 것을 진언했다.
시황제가 신하들에게 순우월의 의견에 대해 가부를 묻자 군현제의 입안자 인 승상 이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봉건시대에는 제후들 간에 침략전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 제는 통일되어 안정을 찾았사오며, 법령도 모두 한 곳에서 발령(發令)되고 있나이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 만을 옳게 여겨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선비들이 있사옵니다.
하오니 차제에 그러한 선비들을 엄단하심과 아울러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醫藥) 복서(卜筮) 종수(種樹:농업)에 관한 책과 진나라 역사서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소서."
시황제가 이사의 진언을 받아들임으로써 관청에 제출된 희귀한 책들이 속 속 불태워졌는데 이 일을 가리켜 '분서'라고 한다.
당시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므로, 책은 모두 글자를 적은 댓조각을 엮어 서 만든 죽간이었다.
그래서 한번 잃으면 복원할 수 없는 것도 많 았다. 이듬해 아방궁 이 완성되자 시황제는 불로장수의 신선술법을 닦는 방사 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노생과 후생을 신임했으나 두 방사는 많은 재물을 사취한뒤 시황제의 부덕을 비난하며 종적을 감춰 버렸 다.
시황제는 진노했다. 그 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시중의 염탐꾼을 감독하는 관리로부터 '폐하를 비방 하는 선비들을 잡아 가뒀다'는 보고가 들 어왔다.
시황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엄중히 심문한 결과 연루자는 460명이나 되었다.
시황 제는 그들을 모두 산 채로 각각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는데 이 일을 가 리켜 '갱유'라고 한다.
[출 전]《史記》《十八史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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